> 연평도
시인 기형도의 고향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형도 시인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이 연평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뭍에서보다 한 달 늦게 찾아오는 연평의 봄은
마당의 목련이 꽃을 피울 무렵이면 짙은 안개로 침묵한다.
그 깊이는 진공의 우주와 같으며
들떠 미쳐 돌아가는 인간에게 자신을 좀 돌아보라고 충고하는 듯
쉼의 시간을 내어준다
연평도(延坪島)는 섬의 모양이 길고 평평하게 뻗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위를 달려가고 있는 기차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대연평도는 면적 약 7.3㎢에 약 2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면적은 작은 편이지만 1일 9회 운영하는 버스(032-899-4377)가 운행되고 있으며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굳이 차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도 여행을 할 수 있다. 주변에는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4.5Km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고 그밖에 4개의 무인도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면적 0.24㎢인 소연평도의 원래이름은 대청도, 소청도와 같이 크기로 짝을 이루는 이름이 아니었고 섬이 쇠같이 무겁다는 뜻으로 쇠연평도라 부르다가 오늘날의 소연평도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해 주듯 예전에는 이곳의 돌을 쇠대신 사용했고, 실제로 해발 214m 높이의 정상부터 해저에 이르기 까지 모두 광석으로 이루어 진 섬이라고 한다. 소연평도는 구운몽을 지은 저자 김만중이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문헌기록을 찾을 길 없지만 세상의 난리를 피해 300여 년 전에 그가 소평도에서 살면서 이곳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고한다.
연평도의 눈물을 누가 닦아 줄까?
1958년 한반도를 휩쓸었던 태풍 사라호는 한반도 역사상 재산 및 인명 피해 측면에서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때 희생된 연평도 어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가 ‘눈물의 연평도’이다. 당시만 해도 연평도는 전국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파시가 형성되었었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태풍으로 부서진 수백 척의 어선과 죽은 어부의 시체가 바다를 뒤엎는 지옥이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서서히 연평도에서 사라진 조기는 꽃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 지역에 들어와 조업을 하는 수백 척의 중국어선들 때문에 꽃게가 잡히질 않아 연평도 어민들의 시름은 깊어 만가고 있다.
연평도의 눈물이 마르는 날까지_연평도 안보교육장
연평도는 북한의 부포리와는 불과 10Km, 석도와는 2.8Km 떨어져 국방의 전초기지를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섬이다. 북방한계선(NLL)을 마주보고 있는 근거리 접적지역(接敵地域)이면서 북한의 해안포 진지를 지척에 두고 있어 서해바다에서 가장 긴장감이 돌고 있는 군사지역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에는 2차례에 걸쳐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으로 ‘연평해전’이 발생했고 한국 해군 6명이 목숨을 잃었고, 25명이 다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 전쟁이후 해군함정이 최초의 교전을 벌인 사건이었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북한이 연평도 군부대와 민가에 150여발의 포격을 가한 ‘연평도 폭격사건’이 있었다. 당시 불타고 파괴되었던 민가는 복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연평도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연평도 안보교육장에 가면 폭격사건 당시 파괴된 집을 볼 수 있으며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어 분단의 아픔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등대공원과 조기역사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평화공원에는 연평해전과 연평도 폭격사건의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연평도 안보교육장
입장료: 무료
관람시간: 10:00~18:00
휴관 매주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tip) 영화 <연평해전>
2015년 6월에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에서 벌어진 실화를 담고 있다.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경기가 열리던 그날은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날이지만 연평도 바다에서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실화와 실존 인물을 영화로 재구성한 영화<연평해전>은 현실감과 진정성을 담았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으며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조국을 지키는 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평화공원(전사자 위령비)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고 튼튼한 안보를 통한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공원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조형추모비는 용치(龍齒, 용의 치아 모양을 한 바다 방어시설)를 형상화한 추모비로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숙연해진다. 공원 뜰에는 군에서 사용하는 탱크와 장갑차, 헬기를 전시해 안보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조기역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병풍바위와 가래칠기해변을 내려다보는 뷰 포인트 시설이 있으며 조기역사관을 지나 곧장 가면 폭 2m, 길이 150m의 연평도 군작전 시설물인 군터널이 있는데 이곳은 군 시설물이지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어 가 볼만하다. 터널 안은 LED 조명으로 되어 있으며 터널 양 옆에는 옹진군의 과거와 현재를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이곳은은 하절기는 17:00, 동절기에는 16:30까지 개방하고 있으니 참고하자.
망향전망대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북녘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위에 세운 전망대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한의 해주 시멘트 공장에서 올라오는 연기까지 보인다.
연평도의 화양연화(花樣年華)_ 조기파시
당섬 선착장에서 연육교를 지나 왼편으로 올라가다보면 산 정상에 궁궐 같은 건물과 함께 조기배가 둥둥 떠 있다. 조기역사관은 선착장 근처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기 잡는 배는 왜 바다 근처에 있지 않고 산꼭대기에다 만들어 놓았을까? 조기역사관에 들어가 꼼꼼하게 전시물을 읽어보면 연평도에 조기가 밀려오던 시절의 영화(榮華)를 알게 되어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조기는 연평도에 황금시대를 열어 주었다. 1957년에 연평도 전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진짜 이곳이 연평도 인가 의심할 정도로 번화하다. 조기를 잡는 기간은 4월 중순부터 6월 상순까지 약 50일이었는데 전국의 어선들이 연평도로 모여 3천여척의 배에 선원 수만도 몇 만 명이 오고 갔으며 연평도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니니 연평도에 가면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조기파시는 일제 말기 최고 절정을 이루어 큰돈이 몰렸고 돈을 따라 술집과 잡화점등 즐비했다. 1950년대까지 흥청거리던 연평파시는 조기가 급격히 사라지면서 막을 내렸고 지금은 연평 파출소 옆에서 시작되는 조기파시 탐방로를 걸으며 지나간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전시관 2층으로 올라가면 사방이 툭 트인 누마루 형태의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1, 2차 연평해전이 벌어졌던 장소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해질 무렵이면 멀리 북녘 땅을 바라보며 바다로 사라지는 낙조를 볼 수 있는 일몰 포인트이다. 조기역사관 뒤편으로 가면 추락주의라고 쓰인 푯말 왼쪽으로 높이 40여m의 깎아지른 빠삐용 절벽이 보인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이 절벽은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뛰어내린 절벽과 닮았다.”고 해서 자연스레 빠삐용절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절벽 아래로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져있는 급경사의 빠삐용 절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아찔함이 있다.
연평도 등대공원의 위치는 평화공원 맞은편에 있다. 해방전후부터 1968년까지 황금의 조기파시를 이루었던 연평도 앞바다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어선의 길잡이로 1960년 3월 첫 점등을 시작으로 찬란한 황금어장을 굽어 비치어 왔으나 1974년 7월 국가안보의 목적으로 일시 소등하게 되었고 1987년 4월 등대로서의 용도가 폐지되면서 이제는 조용히 지난 과거를 기억하며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얀색 등대 주변으로 분홍색 벚꽃 어우러지는 봄날은 일 년 중 연평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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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많이 잡히게 도와주는 서해의 신_충민사
병자호란(1636) 때 임경업 장군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으며 이것이 연평도의 조기잡이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임장군에 대한 고마움의 뜻을 보답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장군의 공을 길이 전하며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면서 풍어와 함께 해상의 무사고와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원래 있던 사당의 자리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고 당섬에 있었는데 어느 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섬에 불이 나서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전소하게 되었고 이 때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불에 타면서 공중으로 올라 북쪽으로 날아가다가 현재의 당산마루에 타버린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재가 되어 조용히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것을 본 연평도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의 혼이 화재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에 충민사를 지어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임경업 사당에 얽힌 설화는 일제강점기 때 있었다. 연평도에서는 어기 때가 되면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척의 선박과 수만 명의 선원들이 임경업 장군의 사당에서 무사고를 기원하는 참배를 하고나서야 출어를 했고 음력 정월 초순에는 연중 가장 큰 행사로 풍어제를 올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인들은 충민사 바로 뒤에 일본신사 건립을 하려고 했다. 신사 터를 닦던 날 밤에 잠이든 일본인 책임자의 꿈에 임경업 장군이 나타나 원상태로 해 놓지 않으면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다음날 일본인 책임자는 겁에 질려 원상태로 복구했고 그 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재물을 마련하여 마을 원로들을 모시고 직접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연평도뿐 아니라 어민들에게 임경업 장군은 고기를 많이 잡히게
도와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다.
안개 자욱한 연평도에서 기형도의 시를 만나다.
"이 읍(邑)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江)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일행(一行)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기형도의 詩 <안개> 中에서
* 기형도 (奇亨度, 1960.02.16~1989.03.07)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증이었다고 한다.
작가 노트
특별했던 어제 하루를 적어 본다.
이 기억은 꽤 오래갈 것 같다. 나는 결국 연평도의 짙은 안개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기묘한 끈에 붙들려 하루 더 연평도에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사전 투표일이라 특별한 일도 없고 해서 연평도 주민들과 함께 대피소에 마련된 투표장소에 갔다. 섬에서도 전자장비를 이용 이 지역 주민이 아니라도 사전투표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에 놀라고 계속 두터워져만 가는 안개에 더 놀라면서 종일 연평 도서관에 머물렀다. 덕분에 연평도서관에 근무하는 김명선 사서와 두 끼의 식사를 같이하고 긴 얘기를 나누며 연평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 가려고 짜 두었던 자월도 일정이 틀어졌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집으로 가지 못한 불안은 점점 흐려지고 솜이불처럼 연평도를 덮고 있는 안개가 점점 포근하게 느껴졌다.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닌가? 되돌아보니 너무 조급하게 안달하는 시간들을 살아왔다. 자 여기 연평에다 다 내려놓고 쉬어 가자. 남아있는 인생의 긴 여행을 잘하기 위해!
사진 및 글 제공: 양소희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