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작도
바다가 만드는 자연의 경이로움 _ 이작도
이작도는 섬 자체의 아름다움도 뛰어나지만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드넓은 풀등이 펼치는 장관에 자신도 모르게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 이작도 ( 伊作島 ) 는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즉도 ( 伊則島 ) 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 이작도라는 지명은 세곡선 ( 稅穀船 ) 을 약탈하는 이적 ( 夷賊 ) 이라 불리던 해적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 또는 이곳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 ( 倭寇 ) 를 이적 ( 伊賊 ) 이라 불렀는데 거기서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일반화 되어 소개되고 있다 . 하지만 모두 고증되지 않은 내용이다 . 대동여지도에 이작도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의 이즉도가 조금 바뀌어 이작도로 된 것일 뿐이다 . 최초의 기록 이즉도가 어떤 연유로 생긴 이름인지는 마땅한 근거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니 이작도를 해적과 연관하여 소개하는 것은 맞지 않다 .
어머니의 품 속 같이 포근한 부아산 트레킹
파일럿부두에 내리면 제일 먼저 물때를 확인해야한다 . 썰물 때만 볼 수 있는 풀등이 나타나는 시간을 알아보고 풀등으로 데려다 줄 배편도 예약하고 부아산으로 향하자 . 선착장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10 분정도 걸어가면 삼거리 큰마을이 나온다 . 큰마을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부아산으로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대이작도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부아산과 송이산이다 . 이 산들은 손을 잡고 있는 듯 길게 이어져 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총 4 시간 반이 걸리는 바다산행을 즐기기 위해 이작도를 찾는다 . 대이작도를 지켜주는 부아산은 산 정상이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 정상은 159m 로 30 분이면 도착하는 그리 높지 않은 산 이다 . 아슬아슬한 빨강색 구름다리를 건너 정상 부아정에서 땀을 식히다 보면 인천 시내와 주변의 승봉도 , 소이작도 , 사승봉도 , 덕적도 , 소야도 , 굴업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 날씨가 좋을 때는 멀리 있는 황해도 해주 땅까지 보인다 . 또한 일출 일몰이 아름다워 연인들이 즐겨 찾는 해맞이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 부아산 정상 그 자체가 자연이 만든 최고의 전망대인 셈이다 . 정상에 서서 바다위로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고단했던 도시 생활이 씻은 듯 날아가 버린다 . 어머니의 품 속 같은 포근함이 좋은 산이다.
영화 < 섬마을 선생 > 의 촬영지 _ 계남분교
지금으로부터 약 50 년 전 상영했던 영화 < 섬마을 선생 >(1967) 은 당시 최고의 가수 이미자의노래를 영화로 만들었고 그 촬영지가 바로 이작도에 있다 . 이작도의 동쪽 끝에 가면 사승봉도를 바라보고 있는 계남분교는 폐교된 지 오래 되어 풀들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이곳이 학교였을까 의아해진다 . 폐교된 후에 옹진군에서는 사유지였던 이곳을 구매해서 관광명소로 살리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 섬마을 선생님 영화 촬영지라는 기념비만 있으니 굳이 찾아 갈 곳은 아니다 .
오형제바위
대이작도 북서쪽 산허리에 있는 오형제 바위는 옛날에 효심이 지극한 형제가 어부인 부모님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백제 시대에 어부였던 부모님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위하여 물고기를 잡기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바다만 바라보며 슬피 울던 오형제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 그 후 오형제 바위가 있던 곳에서는 자주 불상사가 생겼다 .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때부터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형제를 위한 기원제를 지내주 며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게 되었다고 한다 .
작가 노트
이작도를 소개하는 글의 대부분은 해적의 소굴이었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 한 바 있다 . 그런데 왜 이작도와 해적을 연관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을까 ? 그것은 실제로 서해의 세곡선 뱃길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해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오늘날에 해적이라고 하면 영화 < 캐리비안 해적 > 을 장난처럼 떠 올리는 것이 고작이지만 해적 바이킹은 중세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정복자가 되어 노르만 왕조와 키에프 공국을 세웠다 . 또한 엘리자베스 1 세 때는 노예상인이며 해적질을 하던 무리를 에스파냐의 무 적함대를 격파해 국가공인을 받기도 했다 . 해양왕국의 역사가 곧 해적의 역사였던 시대가 있었다 .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한반도를 위협했던 일본의 해적집단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었다 . 지방호족에 의해 훈련되고 통솔된 정예부대로 수군이었다 . 그들은 우리나라의 여러 섬들을 왜구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도 포작이라 불리는 해적이 있었는데 중국의 이적 ( 夷賊 ) 이나 일본의 왜구 ( 倭寇 ) 에 미치지 못하는 양민들이었다 . 그들은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몰래 어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왜구와 결탁해 노략질을 했다 . 포작은 나라가 키운 해적이었던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해상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전투에 활용에 승리를 거두었고 전쟁 후 모두 양민으로 환원해 주었다 . 그러나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을 떠돌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
해적하면 누구나 성격이 포악하고 거친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 . 그래서 이작도와 해적을 연관하여 소개하는 글을 보면 이작도 주민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아닐까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 이작도를 해적과 연관하여 소개하는 것은 마땅한 근거 자료가 없으니 맞지 않다 . 바로 잡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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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봉도
봉황새가 살았을 것 같은 천상의 풍경 승봉도
승봉도 ( 昇鳳島 ) 는 자월면에 속하는 섬으로 본래이름은 신황도였다고 한다 . 예전에 신 ( 申 ) 씨 황 ( 黃 ) 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 고기를 잡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해서 오게 되었는데 먹을 것도 많고 경관도 좋아 이 섬에 마음에 들어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 그런데 이 섬에 이름이 없다보니 사람이 사는 곳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자신의 성을 한 글자씩 따서 신황도 ( 申黃島 ) 라 이름 지었다 . 그 뒤로 오랫동안 이 이름으로 불렀으나 섬의 모양이 마치 봉황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과 비슷해 승황도 ( 昇凰島 ) 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승봉도 ( 昇鳳島 ) 는 승황도 의 ‘ 凰 ’ 을 ‘ 鳳 ’ 으로 바꾼 것인데 두 글자 봉황을 뜻하는 같은 글자이다 .
승봉도의 대표 명소는 이일레해변
승봉도 사람들이 제일 명소로 자랑하는 이일레해변은 선착장에 내려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 길이는 1.3Km, 폭은 40m 로 승봉도에서는 유일하게 밀가루 같은 고운모래가 펼쳐져 있는 해변이다 . 썰물 때가 되어도 고운 모래는 더욱 드넓게 펼쳐 질 뿐 갯벌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 단단하고 고운 모래사장 뒤로 해송이 펼쳐져 있어 해변을 걷다보면 승봉도의 섬 모양이 봉황새가 아니라 봉황새가 살았을 것 같은 천상의 풍경을 느껴 볼 수 있다 . 만약 , 사리 때에 승봉도에 있게 된다면 밤에 손전등을 들고 이일레해변으로 나가보자 . 낙지 , 고둥 , 소라 , 골뱅이를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다 .
이일레해변를 제외한 승봉도의 해안은 대부분 크기가 큰 자갈들이 가득해 해변하면 고운 모래를 기대하는 여행자에게는 아쉬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 그렇지만 거칠고 투박한 몽돌들이 깔려있는 해변은 물이 빠지고 나면 조개를 캐거나 낙지를 잡는 섬사람들의 소중한 일터가 된다 .
최대한 느긋하게 여행하기 _ 부두치 해안산책로
이일레해변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길을 나서면 울창한 솔숲이 길 양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 승봉도 사람들이 이일레해변 다음으로 사랑하는 곳이 바로 소나무 숲이다 . 바닥에 깔린 푹신한 솔잎 위를 걷다보면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 승봉도는 가장 높은 당산이 해발 68m 라 누구나 큰 힘들이지 않고 즐기며 걷기 좋다 . 승봉도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최대한 느긋하게 걸으며 여행하기를 권한다 . 왜냐하면 전체 면적이 2.22Km, 해안 길이가 총 9.5Km 인 작고 아담한 섬이기 때문이다 .
싱그러운 솔 숲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부두치가 나온다 . 그곳에는 잘 만들어진 해안 산책로가 여행자를 맞아준다 . 해안을 따라 바위 위로 걸어야 하는 길이라 습기에 젖은 표면이 위험해서 나무테크 산책로를 만든 것 같다 . 여행자에겐 참으로 고마운 길이다 . 긴 산책로를 걷다보면 희귀새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이곳의 역사를 가늠할 만한 시간의 돌도 만나게 된다 . 길 끝에는 툭 트인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물이 빠질 때만 건너 갈 수 있는 목섬이 있다 . 부두치에 물이 빠지면 몽돌 사이로 낙지와 키조개 등을 주울 수 있고 물이 들어와도 수심이 낮아 수영하기 좋은 해변이 펼쳐진다 . 부두치는 이일레해변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또다른 모습의 해안절경을 보여준다 .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_ 남대문 바위
승봉도는 열심히 잰 걸음으로 해안일주도로를 걸으면 2 시간에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다고 한다 . 그렇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 절경을 감상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승봉도 여행은 하루해가 짧기 때문이다 . 기암절벽이 있는 북쪽해안 앞말에 도착해 오른쪽으로 향해 걷다보면 남대문 바위가 있다 . 용솟음산 바로 밑에 있는 거대한 암석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남대문 바위는 간조 때만 접근할 수 있으니 물때를 알아보고 찾아가는 것이 좋다 . 파도에 깎이고 비바람에 씻겨 만들어진 바위 문 ( 門 ) 으로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어서 마치 서울에 있는 남대문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그런데 멀리서 보면 코끼리가 바닷물을 먹기 위해 코를 바닥에 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주민들은 코끼리 바위라고도 부른다 . 남대문 바위 위 벼랑 끝에는 아슬아슬하게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신비하다 . 남대문 바위 주변에는 해안가를 따라 신기한 모양의 바위들이 줄을 지어 있어 바위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름을 붙이는 재미가 있다 . 남대문 바위는 특별히 젊은 남녀에게 인기가 높은데 그 이유는 이 문을 지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이다 .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승봉도에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부모가 여자를 딴 섬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남녀는 이 문을 넘어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고 이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부채바위
물이 차면 물위에 둥실 떠 있는 부채바위는 맑은 날 햇빛이 부채바위에 와 부딪치면 마치 황금부채처럼 빛이 난다고 한다 . 그래서일까 ? 선비가 어느 날 부채바위 아래를 거닐다가 문득 떠오른 시를 적어 두었는데 마침 과거시험을 보러가서 그 시를 적어 내었더니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그 이후로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이 부채바위에 와서 자신도 좋은 성적으로 입신양명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
촛대바위
승봉도 남동쪽 부두 끝 소리개산 밑에 길쭉하게 서 있는 바위로 그 모습이 마치 촛대같아 촛대바위라 부르고 있는데 엄지 검지를 잡고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있는 부처님의 손 같기도 하다 .
사승봉도
승봉도 남쪽 1 ㎞ 떨어져 있는 개인소유의 무인도이다 . 대이작도 동쪽 끝 마을인 계남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 ㎞ 거리에 있다 . 작은 섬이지만 간조 때가 되면 은빛 모래사장이 대평원을 이룬다 .
흑염소
자연 초지에서 방목해서 사육하는 자월면의 염소들은 약초 , 약쑥 등을 먹고 자라 탁월한 효혐이 있어 보양식품으로 인기가 높다 .
작가노트
섬여행은 육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세계를 보여준다 . 섬에서는 육지의 시간과는 다른 시계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육지에서의 생활은 해와 달과는 상관없이 밤낮 미쳐 돌아가지만 섬에서는 달이 만들어 준 물때가 사람들을 깨우고 재운다 . 또한 섬으로 가는 길은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 바다가 길을 허락해 주어야 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할 수 있다 .
승봉도로 출발하는 배를 타기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 집에서 출발했다 . 이번에 여행할 섬에 대해 내 마음대로 상상하며 도착한 연안부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 봄날의 바다는 참 얄궂다 . 분명 서울의 날씨는 별일 없었는데 서해바다는 안개주의보로 오전 9 시 출발 시간을 11 시로 연기했다 . 대합실에는 섬으로 향하기 위해 들떠있었던 마음과 몸을 바닥에 내려놓은 여행자들과 육지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장을 본 보따리들 사이로 섬주민들이 보였다 . 대기하는 2 시간 동안 차이나타운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왔는데 출발은 오후 1 시로 또 연기되었다 . 여행객들은 여행을 포기 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떠났고 대합실에는 섬주민들과 꼭 가고야 말겠다는 나 같은 열혈여행자 몇몇이 남았다 . 얼마를 기다렸을까 ?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배에 오르자 긴 기다림의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1 시간 만에 승봉도에 도착했다 . 선착장에는 부녀회장님이 나와 반겨 주셨다 .
봉황새가 날아오른다는 이름의 승봉도는 작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쁜 섬이었다 . 승봉도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면서 문득 이 섬은 마치 밀당하는 연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그 고운 얼굴을 쉽게 안보여 주려고 배에 오르기까지 애간장을 태웠으니 말이다 .
> 자월도
아름다운 달이 차고 기우는 자월면
자월면 ( 紫月面 ) 은 4 개의 유인도 ( 자월도 , 대이작도 , 소이작도 , 승봉도 ) 와 9 개의 무인도 ( 대초치도 , 소초치도 , 벌섬 , 동백도 , 선갑도 , 하공경도 , 사승봉도 , 금도를 포함하고 있다 . 유인도와 무인도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가에 대한 기준이지만 국제해양법을 살펴보면 우선 , 섬에 두 세대이상 거주해서 살고 있어야 하고 먹는 물이 있어야 하며 나무가 자라야 유인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 한세대 또는 한 사람이 살고 있는 경우는 유인도라 부를 수 없다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 자월면의 자월도 , 대이작도 , 소이작도 , 승봉도는 마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다 . 섬여행을 하고 싶지만 처음이라 걱정이 많다면 자월면에서부터 섬여행을 시작해 보자 . 인천연안부두 여객터미널에서 약 1 시간 소요되는 근거리 섬이라 최근 수도권의 새로운 여행지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 자월면 여행을 하려면 주중에는 여객선이 하루에 한번 운행을 하기 때문에 1 박 2 일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 주말을 이용하면 여객선이 하루 3 회를 운항해서 당일여행도 가능하다 .
꿈꾸는 여행자를 반겨주는 자월도
달은 과학적으로 접근을 해보면 암석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이 달을 보며 상상했던 토끼와 계수나무는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면서 끝나버렸다 . 그러나 예로부터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달은 시인의 감성을 흔들었고 , 옛 이야기의 선남선녀의 만남을 달빛아래에서 시작하게 하였다 . 또한 선비들에게는 모난 마음을 다스리는 대상이 되었고 한이 많았던 여인에게는 삶을 다독여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 과학이 달의 신비를 몽땅 벗겨 버린 듯하지만 인간의 저 깊은 감성의 바닥에는 여전히 달에 대한 로망이 살아 있다 . 그래서 일까 ? 자월도로 향하는 마음도 달처럼 둥실 들뜨게 된다 . 제일 먼저 발을 내딛게 되는 곳의 이름도 달바위선착장으로 두 개의 초승달 형상화 한 선착장 입구가 꿈꾸는 여행자를 반겨 준다 .
자월도 ( 紫月島 ) 는 자월면의 주도로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35 ㎞ 지점에 있다 . 면적은 7.26 ㎢ 이고 , 해안선 길이는 20.4 ㎞ 이며 동서로 길이가 6km 가량 되는 길쭉한 모양이다 . 주변에는 소이작도 .· 대이작도 , 승봉도 등이 있다 .
자월도를 천천히 걸어보자 .
영흥도와 덕적도 중간쯤에 있는 자월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소홀도 ( 召忽島 ) 라는 아름으로 불렀다 . 옛 문헌에 많이 나오는 ‘ 소홀도 ( 召忽島 )’ 와 같은 지명들은 당시에 불리던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나타낸 향찰식 표현이라 글자만 그대로 들여다보면 그 뜻을 전혀 해석할 수가 없다 . 당시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소 ( 召 ) 는 조그맣다는 의미이고 홀 ( 忽 ) 은 동네나 골짜기를 나타내는 말로 ‘ 작은 마을 섬 ’ 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소리만 빌어 바꿔 놓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자월도는 오래된 옛이름 소홀도 ( 召忽島 ) 란 의미 그대로 작은 섬이다 . 자동차를 실고 자월도에 오는 차도선이 하루에 한 번 오고 가지만 10 대만 선착순으로 실을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권하고 싶지 않다 . 여행의 맛은 두 발로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차를 타고 주마간산으로 경치를 본 사람은 책장을 휘리릭 넘기기만 한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 천천히 시간을 두고 책을 읽어 낸 사람의 깊이를 따라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자월도는 걷기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아담한 섬이다 . 택시는 없지만 여객선 운항시간에 맞춰 섬을 다니는 공영버스가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고 숙박업소들도 승합차로 이동시켜주기 때문에 자월도는 차가 없어도 여행하기 편한 섬이다 .
인천의 섬을 구석구석 다니다보니 섬으로만 여행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 그들에게 섬을 찾는 이유를 들어보면 진정한 걷기여행을 하려면 섬으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좋다고 소문이 난 육지의 둘레길들은 주변의 소음과 밀려드는 사람들로 고행이 된지 오래라 걸을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현실이다 . 이 시대에 걷기에서 얻는 사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조용한 섬여행 답이다 . 자월도에는 그리 높지 않은 국사봉 (166m) 이 솟아 있어 산과 바다여행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섬이다 . 특히 벚꽃이 피는 봄날에는 30 년이 넘은 벚나무들이 국사봉에 분홍 띠를 두르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 육지에서 벚꽃이 질 무렵부터 자월도의 벚꽃들은 기지개를 피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 도시에 벚꽃 잎들이 바닥에 깔려 아쉬운 마음이 컸다면 바빠서 벚꽃을 즐길 여유를 놓쳤다면 자월도의 국사봉 길을 추천한다 .
자월도
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숙종
37
년
(1711) <
비변사등록
>
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이후부터 쓴 것으로 보인다
.
이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
자줏빛 달
’
이라는 뜻인데 전해오는 유래는 다음과 같다
.
자월도는 예로부터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전답이 많았던 곳으로 세금을 현물로 내던 때였다
.
이때는 남양부의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양부 호방
(
재무담당관리
)
이 세금을 걷으러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했으나 거센 바람이 수일간 불어 돌아가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고향땅을 바라보니 검붉은 달이 희미하게 보여 붉은 자
(
紫
)
와 달 월
(
月
)
자를 써서 자월
(
紫月
)
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
그런데 자월도에서 태어나 육지로 나가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이는 이곳에 뜬 달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푸르른 달이라고 말한다
.
아마도 자월도의 달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 아닐까
?
자월도에서의 달이 유독 아름답다면 그것은 그대의 마음을 닮은 것이다
.
당신이 감상에 젖어 바라보는 자월면의 달은 오늘도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바다의 생명들을 키워내고 섬사람들을 살찌우고 있다 . 바다의 하루는 육지와 다르다 . 섬의 달력에는 낯선 표시가 있다 . 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간조와 만조를 표시한 것인데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야할 때와 갯벌에서 소라 , 고동 , 굴 , 낙지 등을 얻어야 할 때를 알려준다 .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순하게 살아가는 곳이 섬이다 . 자월도는 물이 들어 올 때와 물이 빠져 나갔을 때의 조석간만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인천연안부두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여객선 운항 시간이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을 알아두자 .
목섬 구름다리
큰 목섬과 작은 목섬이 연결된
400m
길이의 구름다리로 마치 허공을 걷는 듯 아찔한 바다 절경을 감상 할 수 있다
.
사진 및 글 제공: 양소희 작가님